展覽資訊
1987 국민의 각성 : 한국 민주주의 산증인의 사진전
發佈日期:
2021-06-21
전람 기간: 2020.6.14(일) - 2020. 9.27(일)
개관 시간: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휴관일: 매주 월요일(단, 월요일이 국정공휴일일 경우 그 다음날 휴관), 춘절기간, 정부 공고 자연재해 휴무일, 본관에서 별도로 정하여 공고한 휴무일.
지원기관/내정부
주최기관/2.28사건기념기금회、2.28국가기념관
협력기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관기관/치딩창의유한회사
머리말
한국과 대만의 역사 발전 과정은 여러 비슷한 부분이 있다. 두 국가 모두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군사 독재 통치를 경험했으며, 시민들의 힘으로 성공적인 민주화 발전을 이룩했다. 최근 몇 년 한국의 군사 독재, 민주주의를 다룬 영화가 대만에서 많은 호평을 일으킨 것도 대만인들이 한국의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 참고하고 비교할 수 있는 이슈였기 때문이다.
대만과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순탄한 길은 아니었으나, 국민들의 힘은 민주화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두 국가의 민주화 추진 과정은 일부 공통점이 있다. 두 국가의 민주화는 특수한 정신적인 동력이 존재했으며, 과거 국가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슬픔을 바로잡는 요구로 형성되었다. 대만의 정신 동력은 1947년 228 사건으로부터 나왔으며, 한국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나왔다.
228사건은 대만인들이 수십 년 동안 가슴에 묻어둔 상처이며 말할 수 없는 금기였다. 이러한 가슴 앓이는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야 천천히 회복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1961년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1979년 암살 당한 후 시민들은 민주화를 기대했으나, 보안 사령관 전두환의 「12▪12쿠데타」로 다시 한번 한국의 민주화 발전을 좌절시켰다.
1980년 5월 전두환은 민주 쟁취를 위한 광주 시민의 행동을 가혹하게 진압했으며, 한국 사회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사건 재조사를 위한 목소리는 계속되었으며, 용감하게 나서서 폭력에 맞서는 한국인들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됐다. 전두환은 탄압으로 독재 정권을 잡았지만, 1987년 4월 13일 개헌 협상을 유보하고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거부하자 시민들은 개인 권력을 계속 이어나가려는 그의 시도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1987년 한국 국민들이 자주적으로 참여한 6월 항쟁은 전두환 독재 정권의 정식적인 종말을 의미했다. 권력자가 장기적으로 집권하는 꿈을 꾸었을 때, 국민들은 성별, 연령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모두 거리로 나와 한걸음 한걸음 민주개혁과 독재 정권의 타도를 요구했다. 6월 29일 노태우가 민의에 투항하여 선포한 「민주화선언(民主化宣言)」 은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개혁 조치에 동의하도록 했으며, 한국은 정식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나아가게 되었다. 이와 비슷했던 대만도 같은 해에 장장 38년간의 계엄령을 해제되고 공식적으로 민주화의 문을 개방하였다.
한국의 민주 발전은 항쟁, 탄압, 좌절과 재기 등의 낯설면서도 익숙한 장면이 있다. 1987년 대만 신문사의 한국 특파원이 6월 항쟁의 현장을 기록하였고, 여러 귀중한 역사 기록을 남겼다. 이번 사진전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피눈물의 현장으로 돌아가 민주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들이 벽 뒤에 숨어서 몰래 지원하는 서민들, 집에서 몰래 시위를 지지하는 시민,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는 목소리와 눈물등 당시 현장의 상황 전체를 다 묘사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민주개혁을 쟁취하기 위해 강한 의지력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귀중한 사진을 통해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서 모두 공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사진 기자 간략 소개
주립희(朱立熙)는 타이중 출신이며 대학 당시 국립 정치대학교 동방어문학과 한국어 조에서 공부했다. 한국어를 배운 배경으로 인해서 한국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대학 졸업 이후 신문사 사진 기자 1등 자격으로 언론 생활을 시작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한성(서울)에 파견된 기간에 그는 한국 민주화의 가장 격동적이며 치열한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며 매우 귀중한 사진을 남겼다.
그는 이전에 “중국시보” 논설위원, “슈퍼 TV” 보도국장, 영자지 “TAIPEI TIMES” 편집국장과 국영 지상파 중화 텔레비전 부사장 등 미디어 요직을 거쳤고 《한강변(漢江變)》, 《안녕 아리랑(再見阿里郎)》, 《국가폭력과 과거청산(國家暴力與過去清算)》, 《한국사 : 비극의 순환과 숙명(韓國史:悲劇的循環與宿命)》등 한국 관련 서적 11권을 저술했다. 그리고 현재는 새로운 세대의 민주 자유에 대한 인식 개발에 가장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주립희는 현재 국립정치대학교와 국립사범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학생들에게 하한(한국을 좋아하는)과 반한(한국을 싫어하는)을 떠나 먼저 「지한(한국을 잘 아는)」을 선행하여, 정확하게 한국에 대해서 인식한 후에 더나은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학교에서 「한국 근대사(韓國近代史)」, 「한국 과거사 청산 영화 평론(韓國轉型正義電影評析)」, 「한국 정치와 민주화(韓國政治與民主化)」와 「북한 연구(北韓研究)」등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중남부 지역에서도 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대만 젊은이들이 한국 드라마, K-POP등 대중문화 이외에 한국 근대 역사 발전과 과거사 청산의 노력에 대해서 알리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한국의 여러 모습의 이해를 통해 대만과 한국 국민이 서로 배우도록 장려하고 있다.
대만과 한국 민주화 여정 대조 요약표
1895-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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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50년의 일본 식민 통지를 받았다.
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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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35년의 일본 식민 통치를 받았다.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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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 국민당정부가 대만을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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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반도가 해방했다.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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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228사건이 발생했으며, 전후 대만 최악의 인권 유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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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제주 4·3의 도화선인 3·1발포사건이 발생했다.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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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주 4·3이 발생했으며, 한국 현대사 중 사망자 수가 한국전에 버금가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한반도가 「대한민국」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열했다.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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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대만 계엄 실시.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하고 중화민국 중앙 정부가 난징에서 대만으로 이전했다.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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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대만 공산화를 막기 위해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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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유엔은 군을 지원하여 북한의 남한 침입을 저지했다.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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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레이전(雷震)이 신당 결성을 선포했으나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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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4·19」혁명:이승만이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으며, 이는 학생 및 민중들의 시위를 촉발시켰고 이승만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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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황원슝(黃文雄)과 정즈차이(鄭自才)가 미국에서 장징궈(蔣經國) 암살을 기획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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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재봉 공장 노동자 전태일이 노동권을 위해 분신했으며, 이 사건은 후에 대만 정난롱(鄭南榕)의 분신에 영향을 주었다.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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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유엔 탈퇴 선언을 강요당했으며, 후에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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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2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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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레이전(雷震)이 〈구망도존헌의(救亡圖存獻議 국가와 민족을 구하는 방법 건의 )〉를 작성하여 장제스(蔣中正)에게 전달했으나 답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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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박정희가 「유신헌법」을 통과시켰으며, 한국 대통령의 임기 제한이 없어졌다.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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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1월 까오슝에서 차오토우(橋頭) 사전이 발생했으며, 이는 계엄 30년간의 첫 정치 시위였다. 12월 10일 까오슝에서 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이 발생했으며, 대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중 민주 항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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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부마항쟁 : 10월 16일 5천 명의 학생이 박정희의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권총으로 박정희를 시해했으며,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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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린씨 저택(林宅) 살인 사건이 발생했으며, 린의슝(林義雄)의 모친과 2명의 쌍둥이 딸이 살해당했고, 큰 딸은 중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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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울의 봄:학교에서의 민주화 운동이 전국의 정치 항쟁으로 변화했으며, 민중들은 「즉각으로 비상 계엄령 해제」를 요구했다. 광주 항쟁:광주 시민의 자발적인 민주화운동이다. 당시 군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진압 명령으로 많은 시민과 학생이 다치거나 죽었다.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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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정난롱(鄭南榕) 등이 반 계엄 운동을 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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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울대학교 권인숙이 「성고문」 사건이 발생했고 민중들이 가두 항쟁을 했다.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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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2·28평화의 날 촉진회(二二八和平日促進會)」가 설립되었으며,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청산 운동이었다. 7월 15일 장장 38년의 계엄이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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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였으며, 민중의 6월 항쟁으로 노태우는 민의에 항복하여 「629민주화 선언」을 발표했으며, 한국은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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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1월 13일 장징궈(蔣經國)가 사망했으며, 귄위 통치의 시대의 종말을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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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울 올림픽이 순조롭게 개최되었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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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정난롱(鄭南榕)이 100% 언론 자유 투쟁을 위해 분신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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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기를 깨고 처음으로 「제주4·3추모제」를 진행했다.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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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3월 16일부터 22일까지 「야백합(野百合)」 학생 운동이 진행되었으며, 이는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이전한 이후 최대 규모의 학생 항의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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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맺었다.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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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 이 폐기되었으며, 대만의 민주화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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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했으며, 동시에 국제적으로 독립 국가 지위를 승인받았다.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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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5월 입법원에서 형법 100조를 수정하여 언론 및 필화죄의 규정을 폐기했으며, 대만은 언론 사상 자유의 시대로 들어섰다.;행정원에서 《「2·28사건」연구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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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었으며, 대만과 단교를 했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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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정식으로 2·28 사건 피해자에 대해서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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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국 국회에서 「5·18민주화운동 특별법」,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을 통과시켰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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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제1차 총통 직선제로 「주권 재민(主權在民)」이 실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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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두환과 노태우 등 16명이 「12·12쿠데타」와 「5·18항쟁」으로 기소되었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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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타이페이(台北) 2·28 기념관이 오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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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5월 18일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5·18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게 되었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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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대만 처음으로 집권 정당이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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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북 공동선언〉 은 남북한 양측의 지도자가 처음으로 만나 체결한 역사적인 문서이며, 남북한 관계 발전의 이정표이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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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입법원에서 국민투표법을 제정하여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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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제주 4·3 진상 조사 보고서가 발표되었고 대통령이 처음으로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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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2·28 사건 책임 귀속 연구 보고서 (二二八事件責任歸屬研究報告)》가 출판되었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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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2·28국가 기념관 현판식이 진행되었으며, 〈2·28사건 처리와 보상 특별 조례 (二二八事件處理及補償條例)〉사 수정되었으며 기존 조문 내용에 있던 「보상(補償)」이 모두「배상(賠償)」으로 변경되었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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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주 4·3 60주년으로 제주 4·3 평과 기념관이 오픈했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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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2·28국가 기념관이 오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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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네스코에서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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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해바라기(太陽花) 학생 운동이 발생했으며, 《해협 양안 서비스 무역 협정 (海峽兩岸服務貿易協議)》통과 심사 강행에 대해서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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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4월 3일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하여 제주 4·3 희생자를 추모하게 되었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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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계엄 해제 30년, 국가 사료관에서 장제스(蔣介石)의 자료를 인터넷에 업로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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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농단」 등의 안건으로 탄핵되었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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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총통부 앞 카이다거란 대로에서 「친중 매체 반대 퍼레이드 (反親中媒體大遊行)」가 진행되었으며, 친중 언론의 침투를 거부하며 홍콩의 「반송중(反送中)」운동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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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18명의 제주 4·3 피해자의 유죄 판결이 철회되었으며, 71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되었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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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2·28 사건 진상 및 과거청산 보고(二二八事件真相與轉型正義報告稿)》가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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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국민의 분노
전두환 독재 정권은 4월 13일 헌법 수정을 거부했으며, 전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천 개가 넘는 사회 운동 단체에서 6월 10일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 운동 본부」를 설립하기로 했으며, 전국의 모든 차량이 오후 6시에 30분 동안 경적을 울리게 요청하였고,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해 항의하는 목소리는 전국 하늘에 울려 퍼졌다. 6·10은 「 한국 민주화의 기원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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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집권당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은 장충체육관에서 당원 대회를 소집했으며, 전두환은 지명한 후계자 노태우를 비경쟁 선거로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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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체육관 안에서는 열렬히 환호했으며,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공범 노태우는 전두환의 독재체제를 이어 받을 수 있었으며, 그들의 기득권을 계속 보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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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 밖은 민중 항쟁으로 집권 당국의 기쁨이 망쳐지지 않도록 군대가 주둔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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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 밖은 민중 항쟁으로 집권 당국의 기쁨이 망쳐지지 않도록 군대가 주둔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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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칼라 계층의 고위 간부들도 모두 랩으로 눈을 가리고 나와 길가의 차량이 경적을 울리도록 요청했으며, 독재 정권에 대한 항의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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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의 승객들도 물안경을 착용하고 창문을 열고 가두시위를 지켜봤다.
거리로 나온 - 시민과 학생의 항쟁
이날은 6월의 다른 주말과 같았다. 거리에서 항쟁이 계속되었고 시민과 학생은 게릴라 시가전을 벌였으며, 경찰은 진압 명령을 받고 바삐 돌아다녔다. 시 중심 도처에는 최루가스 연기가 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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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사무실 창문에도 6월 26일 오후 6시 민주 헌법 평화 대행진에 참여를 호소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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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호인「남대문」(숭례문)에 군대가 주둔하는 것도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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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가스를 계속해서 발포했으며, 시위 민중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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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 사무실 건물에 대자보를 붙여서 항쟁하는 시민들을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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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의 남대문 앞, 진압 경찰의 경비 차량의 창문이 깨지고 방화로 불에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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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앞 진압 경찰의 경비 차량은 민중의 분노로 인해 불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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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들은 천주교 명동 성당에 모여 2,500명의 양심수 석방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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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이 오른팔에 맞고 땅에 떨어졌으나 터지지 않았다. 터지지 않은 최루탄을 당일 힘들게 취재한 나의 「전리품」으로 주워서 집에 가지고 와서 텔레비전 위에 고위 모셔두었다. 2주 후에 일본과 한국의 기자를 집으로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고, 한국 기자가 텔레비전 위의 최루탄을 보고 나에게 텔레비전의 열로 만약 최루탄이 터진다면 이 집은 최소 3개월 동안은 사람이 살수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이틀 후에 매우 아쉬웠지만 경찰서에 습득한 최루탄을 돌려주었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제조한 최루탄의 품질이 「세계 최고」이며, 최루탄에 고추, 마늘, 후추 및 화학 약품을 원료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남한은 최루탄을 이스라엘과 남아공에 수출했으며, 2011년 ~ 2014년에도 터키와 바레인에 대량으로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격렬한 6월 항쟁 - 화이트칼라와 중산 계급의 호응
6월10일은 「6월 항쟁(六月抗爭)」이 최고조에 달한 하루였다. 전국의 화이트칼라와 중산층 모두 거리에서 독재 정권에 항쟁했다. 정치 폭풍은 이미 임계점에 달했으며 국민의 힘은 전두환 독재를 전복시킬 정도였다. 미국 정부의 경고로 군사 진압을 할 수 없었으며, 국제 올림픽에서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주최권을 취소할 수 있다는 압력을 가해 정부 당국은 국민의 여론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여 6월 전체에 걸쳐 출렁이던 정국은 가라앉았다. 대만의 장징궈(蔣經國)가 민의의 압력 아래 1987년 7월 15일 계엄 해제를 선포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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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칼라와 중산층 모두 출근시간에 거리에 나와 시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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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옆 거리에서도 직장인들이 「쟁취 민주(爭取民主)」깃발을 들고 시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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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입원한 환자들도 환자복을 입고 거리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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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명동 성당의 성직자도 중앙 우체국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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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상가의 부녀자들은 장사를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길가에 앉아서 깃발을 흔들며 시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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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근처의 백병원의 의료진이 길가에서 다친 행인의 상처를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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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 경찰이 지나는 길에 「직선제로, 독재 타도」의 교통 신호등이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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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신세계 백화점」앞에 군대가 주둔하는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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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 시 행인과 부딪쳐서 초점을 잃었지만 진압의 생동감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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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 진압 경찰「백골단」이 시위 군중을 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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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국 대사관은 밤에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군부 측이 쿠데타를 일으키는지 감시하고 있다.
청년의 희생
「6·10항쟁」 하루 전날일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진압을 위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 뒷부분을 맞아 4주 후인 7월 5일 사망 선고를 받았다. 7월 6일부터 분노한 연세대학교 학생은 교내에서 이한열 추모와 정부 규탄 대회를 개최하였다.
연세대 학생의 추모와 항쟁 이외에 7월 7일부터 고려대학교까지 추모가 확산되었고, 전국의 각 대학의 학생회 대표들이 모두 참여했다. 6만 명이 고려대학교 운동장에 모여 함께 큰소리로 「독재 정권 물러가라! 」외쳤으며, 분노한 목소리가 하늘까지 울려 퍼지는 전에 본 적 없던 일이었다.
7월 9일 이한열의 고별식. 전날 7월 8일 연세대학교 학생회 회장 우상호 (현재「더불어 민주당」국회의원)의 인솔 아래 교내에 모인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계속 가두 행진을 진행했다. 그들은 이한열의 영정 사진을 들고 폭력 진압을 한 경찰의 사과를 요구했다. 시위의 분위기는 평화로웠으나, 학생들의 분노한 감정은「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말자」라는 표어로 대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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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대학교 본관 건물 앞에 검은색 조기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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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열이를 살려내라! 」 대형 판화로 제작된 걸 그림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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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도서관 앞 성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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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토대회에서 학생 대표가 교대로 독재 정권의 폭정에 대한 규탄 발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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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도서관 앞 성토대회 대자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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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얼굴에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뒤엉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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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학생회관 앞 이한열을 추모하기 위해 길게 줄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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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원형 광장에서 「쿰바야」를 부르며 이한열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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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바야」를 부른 후 독재 정권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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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성토대회 후 교문 밖으로 가두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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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갔으며, 시위대 진압을 위해 진주해있던 진압 경찰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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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학생들이 나무 방망이 또는 맨손으로 진압 경찰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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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맨손으로 진압 경찰에 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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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운동장에 6만 명이 모였으며, 분노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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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의 모친은 “노태우, 죽일놈 어디 갔나?”라고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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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로 나온 시위대의 얼굴에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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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학생회장 우상호가 최류 가스가 자욱한 곳에서 이한열의 영정을 들고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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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민주의 불꽃으로!」라는 표어를 작성한 학생들이 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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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열이 연세대학교 교문 밖으로 나아갔다. 태극기를 들고 “출정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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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 대로에 진압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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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의 영정을 들고 진압 경찰에게 “한열이를 살려내라!”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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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방독면을 벗고 한숨 돌리고 있으며, 눈은 이미 모두 부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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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말자」진압 경찰이 도로변으로 철수하자 학생들은 계속 나아갔다.
민주주의의 서광
이날은 연세대에서 가장 침통한 하루였다. 학교의 모든 학생과 교수, 다른 학교의 학생 및 각계의 사람들이 애국 학생 이한열 열사의 「국민장 (國民葬)」을 열었으며, 서울 대학교 무용 교수 이애주(李愛珠)의 위령무의 선도 아래 이한열 열사의 영구가 정식으로 움직였다. 연세대학교 학내와 학교 밖에는 이미 40만 명이 빼곡히 둘러 슬퍼했다. 많은 기자와 애도하는 사람들이 고가 철로에까지 올라 높은 위치에서 전체 현장을 지켜보았다. 기차도 잠시 멈춰 서서 기차의 승객들도 영결식을 볼 수 있었다. 서소문 길에서 시청 앞 광장으로 들어설 때 이미 백만 군중이 이한열의 송별을 위해 모여 있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이한열 열사를 위한 노제 이후 운구 차량은 고속도로를 달렸으며, 영구는 광주의 「5·18묘역」에 안장되었다.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고별식이었으며, 주한 외신 기자들 모두 감탄을 금하지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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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학생 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 이한열의 영구가 천천히 교문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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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와 함께 「민족민주투쟁의 영원한 선봉」 인도 아래 국기를 덮은 영구가 교문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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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철도의 기차도 잠시 멈췄으며, 승객들은 고별식의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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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구 행렬을 선도하는 깃발이 서울 시청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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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앞 광장은 추모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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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앞 추모 깃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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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구 행렬은 서소문을 거처 남대문로를 지나 시청 광장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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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명의 인파가 이한열의 고별식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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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외신 기자들도 단체 사진을 기념으로 남겼으며, 모두 고별식에 대해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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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의 영정을 들고 진압 경찰에게 “한열이를 살려내라!” 포효했다.
맺음말
선인들의 희생과 공헌이
오늘날의 민주, 자유와 인권으로 이어졌으며
한국의 6월 항쟁이 이와 같으며, 대만의 228도 그러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遺忘歷史的民族,沒有未來)」
역사감이 있는 대만인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