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전시
「토지의 상처: 228사건유적지-북부지역」특별전
2단계 전시: 총소리 이후

 發佈日期:2021-07-19

전시기간/2021년5월 20일 ~8월 15일
전시장소/2·28 국가기념관(타이베이시 난하이로 54호 2층 남측)
개관 시간/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휴관일/매주 월요일(단, 월요일이 국정공휴일일 경우 그 다음날 휴관), 춘절기간, 정부 공고 자연재해 휴무일, 본관에서 별도로 정하여 공고한 휴무일.
지원기관/내정부
주최기관/2.28사건기념기금회、2.28국가기념관
주관기관/사단법인 타이완상생청년협회

머리말

1947년에 발생한 228사건은 대만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당시 사건을 겪은 장소와 건물들은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으며 228사건의 ‘228유적지’가 되었다.

이러한 유적지에는 정부의 관공서, 시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생활장소 그리고 시민의 희생과 피해를 입은 장소가 있다. 이번 전시회는 공간을 주축으로 삼고, 문헌 기록과 장소, 건축, 노선에 대한 기억을 구술한 것을 참조하였기에 더 구체적으로 또 역사적 사건을 점과 선에서 면에 이르는 복잡한 양상들을 조금이나마 차례로 연결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는 228사건 발생의 시간의 순서와 현시縣市의 공간 이라는 두개의 시각으로 3단계 전시회 주제를 기획하였다. : 1단계 전시에서는 전쟁 후 초기 타이완 즉 1947년2월 사건 발생지-타이베이 천마 다방 불법담배 단속 유혈사건에서부터 같은 해 3월1일 임시 계엄까지의 상황을 서술의 주축으로 삼았다. 2단계 전시에서는 타이베이시 서쪽, 단수이강淡水河 이남의 타이완 북서부 현시에서 타이베이에서 발생한 사건 소식을 접한 뒤 각지의 시민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대처했는지, 집회와 토론 상황은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3월8일 ‘남경정부 군대’가 상륙 후 각지에서 유화정책과 지방을 소탕한 정황들을 서술한다. 마지막 3단계 전시에서는 사건 발생 기간 타이베이 북동부와 타이완 동부 이란宜蘭,화리엔花蓮 지방 민.관의 상호관계. 특히 지룽항基隆港에서 육군 재편성된 제21사단이 상륙한 후 무차별 사격과 총살로 시민 사상자가 발생한 역사를 보여주게 된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이번에 전시되는 유적지의 범위는 타이베이臺北, 지룽基隆, 타오위안桃園, 신주新竹, 먀오리苗栗 그리고 동 타이완의 이란宜蘭, 화리엔花蓮 등의 현시縣市가 포함된다.


2단계 전시: 총소리 이후
전시일: 2021년 5월20일~8월15일

3월 1일, 민의대표들은 불법담배단속 유혈살인사건 조사위원회를 소집하였고, 3월2일에는 228사건처리위원회(二二八事件處理委員會)로 개편하고 중산당(中山堂)에서 총회를 열어 각 방면의 대표를 포용함으로 사건이 원만하게 마무리 짓게 되기를 기대했다. 4일에 전 성省 17개 현시 처리위원회를 조직하여 통지함으로, 사건 처리의 후속조치가 낙관적으로 전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각지에 처리위원회가 성립되는 것과 동시에 천이(陳儀)는 장제스에게 전보를 쳐서 대륙에서의 파병을 요청했다. 천이는 중앙정부에 병력을 요청하면서 섬내에서도 병력을 이동시켰지만 대외적으로는 군사진압은 없을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사건은 더 이상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 臺北市警察局第一分局 타이베이시 제1경찰분서|臺灣新文化運動紀念館 타이완 신문화 운동 기념관
  • 臺北商業學校 타이베이 상업학교|國立臺北商業大學 국립 타이베이 상업대학
  • 臺北工業學校 타이베이 공업학교|國立臺北科技大學 국립 타이베이 과학기술대학
  • 臺灣省立法商學院 타이완 법과상업학교|臺灣大學徐州路校區 타이완대학교 법학대학 쉬저우로 캠퍼스
  • 延平學院 옌핑 대학|開南中學 카이난 고교
  • 板橋中山堂 반차오(板橋) 중산당|板橋區公所 반차오구공소(구청)
  • 淡水中學 단수이 중고교|淡江中學 단쟝(淡江) 고교
  • 關渡埔頂 관두푸딩|關渡埔頂 관두푸딩
  • 淡水沙崙 단수이 사룬|淡水沙崙 단수이 사룬
  • 桃園車站 타오위안 역|桃園車站 타오위안 역
  • 新竹縣政府 신주현정부|合作金庫銀行桃園分行 합작금고은행 타오위안 지점
  • 新竹縣警察局桃園分駐所 신주현경찰국 타오위안 파출소 분소|桃園市新住民文化會館 타오위안 신주민문화회관
  • 桃園景福宮 타오위안 경복궁|桃園景福宮 타오위안 경복궁
  • 新竹都城煌廟 신주도 성황묘|新竹都城煌廟 신주도 성황묘
  • 新竹市政府 신주시정부|新竹市政府 신주시정부
  • 臺灣新竹地方法院 타이완 신주 지방법원|臺灣新竹地方法院新竹簡易庭 타이완 신주 지방법원 신주 간이법정
  • 二二八事件處理委員會新竹分會 228사건처리위원회 신주지부|新竹高中 신주중고교
  • 新竹旭橋 신주 아키라 바시|成功橋 청공교(成功橋)
  • 後龍車站 허우룽 역|後龍車站 허우룽 역
  • 憲兵第四團 헌병 제4여단|第一銀行資訊大樓及私人停車場 제일은행 정보빌딩 및 사설주차장
  • 臺灣省警備總司令部第二處警衛大隊看守所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 제2처 경비대대 구치소|獅子林商業大樓 스즈린 상업빌딩
  • 臺灣高等法院 타이완고등법원|司法大廈 사법 빌딩
  • 臺北植物園 타이베이 식물원|臺北植物園 타이베이 식물원
  • 臺灣省警備總司令部勞動訓導營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 노동교육대|國防部海軍司令部 국방부 해군사령부
  • 川端橋 가와바다교|中正橋 중정교
  • 臺北橋 타이베이교|臺北橋 타이베이교
  • 南港橋 난강교|南港橋 난강교

시끌벅적・모두가 한자리에

1947년2월27일과 28일 연이틀 동안 불법담배 단속으로 인한 충돌은 군중들의 항쟁으로 이어졌다. 행정장관공서 앞에서 유혈충돌 사태가 발생하고 타이베이 시내의 소란 상황은 지속적으로 확산되면서 행정기관의 업무는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28일 오후, 경비총사령부는 타이베이 시내에 대한 임시 계엄령을 선포하며 집회 시위를 금지했다. 아울러 무장 군경이 시내를 순찰하면서 때때로 길거리 행인들을 향해 난사하였다. 항의 군중은 타이완라디오방송국을 통해 타이완섬 전역으로 사건 상황에 대해 방송을 했고, 타이베이현(臺北縣-현 신베이시), 지룽(基隆)지역에서도 타이베이시 항쟁에 호응하며 소동을 일으켰다. 각계의 민의대표들은 이 같은 정세를 참작해 정부측과 교섭에 나섰다. 28일 저녁, 성참회의원 왕티엔덩(王添灯), 성참의회 의장 황차오친(黃朝琴) 등은 잇따라 방송을 통해 협상 대표가 정부와 진행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교섭 결과를 기다려 달라는 방송을 했다. 사건이 더 커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3월1일 오전, 타이베이시 참의회는 국민대회 대표, 성참의원, 국민참정회 참정원 등을 초청해 중산당(中山堂)에서 ‘불법담배단속 유혈사태 조사위원회’를 성립하고, 저우옌슈(周延壽), 왕티엔덩(王添灯), 린중(林忠), 황차오친(黃朝琴) 등을 천거해 행정장관 천이(陳儀)와 협상하도록 함과 동시에 계엄령 해제, 총기사용 금지, 처리위원회 공동 성립, 연행된 시민 석방 등의 요구사항을 제기하며 사건을 수습하고자 했다. 천이는 비록 여러 사안에 동의를 하며 직접 방송을 통해서 계엄령 해제를 선포했으나, 여전히 시위와 파업 등 행동은 금지했고 길거리에서는 가끔 총소리도 들려왔다.

3월2일 오전, 옌핑(延平) 전문대학, 사범대학, 법상(法商)대학 등 각 학교의 학생들이 중산당에 모여 천이의 부패 정치를 비난했다. 이날 오후 ‘불법담배단속 유혈사태 조사위원회’를 민.관이 공동으로 조직하는 ‘228사건 처리위원회’로 개편하는 회의를 중산당에서 열었다. 회의에서는 타이베이시 참의원 장칭촨(張晴川)이 천이와의 회견 상황을 우선 보고했고, 이어서는 상업회, 시민, 학생, 노조와 타이완성(臺灣省) 정치건설협회 등에서 대표들을 각자 선출하여 사건 처리 방식에 대해 계속 토론했다. 행정장관 공서는 민정처 처장(處長) 저우이어(周一鶚), 경무처 처장 후푸샹(胡福相) 등 관원 5명을 파견해 처리위원회에 참여하며 정부가 담판 및 정치 개혁의 의지가 있음을 시민들에게 보여줬다. 그러나 천이는 같은 날에 난징(南京) 소재 중앙정부에 타이완에서 동란이 발생해 기존의 주둔 군력으로 평정하지 못하겠으므로 신속히 파병할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천이(陳儀)는 3월2일에 난징(南京) 소재 중앙정부에 파병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국방부 참모총장 천청(陳誠)에게 보낸 전문에는 “신속히 양질의 보병 1개 여단을 파견, 최소한 1개 연대를 먼저 파견해야만 악한들을 숙청하여 남쪽땅을 헤아려 걱정하는 좌하의 우려를 덜어드릴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타이베이시 제1경찰분서


유적지 소개

1920년 총독부는 다다오청(大稻埕) 니씬정(日新町)에 타이베이 북경찰서(약칭 北署북서)를 설치해 베이먼(北門) 이북의 각 파출소를 관할했다. 1933년에는 새로이 낙성한 2층 건물(현 소재지)로 이전했는데, 1층에는 부채꼴 모양의 유치장, 수중 감방, 태형실이 설치되어 있다. 1945년 국민정부가 접수한 후에는 타이베이시 경찰국 제1분국으로 개명했고, 1949년에는 형사경찰총대로 변경해 타이완성 경무처 산하로 개편됐다. 1990년에는 다퉁(大同)분국(즉 다퉁 경찰서)으로 개정했는데 1998년에는 시에서 고적으로 지정을 했고, 다퉁분국은 2012년에 옆건물인 진시가(錦西街) 200호로 이전한 후, 2014년부터 고적 개보수 사업을 전개해 일본통치시대 북경찰서의 모습을 재현했다. 2018년에는 타이완신문화운동기념관이 여기에서 개관되어 부정기적 전람회와 강연 등 활동을 거행하고 있다.

사건과 사적

1947년3월3일 오후, 228사건 처리위원회 치안조는 타이베이시에서 임시 치안위원회를 개최하고 ‘충의(忠義)봉사대’ 결성을 결의하며 쉬더후이(許德輝)를 총대장으로 천거했으며, 타이베이시경찰국 제1분국을 봉사대 사무실로 썼다. 총대장 쉬더후이가 이끄는 사회대(隊)와 부총대장 랴오더슝(廖德雄-당시 학생자치회 연합회 회장, 처리위원회 치안조 부조장)이 조직한 학생대(隊)가 주야 교대하며 타이베이 시내의 치안을 유지했다. 하지만 충의봉사대는 사실 정부에서 획책해 결성한 것이며, 쉬더후이는 경비총부의 지휘에 따라 조직을 기획 결성한 것이며 이는 천이의 비준을 받아 반간책을 펼친 공작이었다.


타이베이 상업학교


유적지 소개

타이완총독부립 상업학교가 1917년에 개교했다. 교사는 타이베이주립(州立) 타이베이제1중학교(현 젠궈建國고교)에 위치해 있으며, 1922년에 주립 타이베이상업학교로 개명하면서 야간 강습소를 증설했다. 1924년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현 소재지로 이전했고 1936년에는 교내에 주립 타이베이제2상업학교를 증설했다. 전후 1947년에는 두 학교를 통합해 타이완성립 타이베이상업학교로 개편했다. 그 후 교사는 수 차례의 개축을 이어가면서 본래의 모습은 사라졌다.

사건과 사적

1947년2월28일, 일부 타이베이상업학교의 학생들이 군중을 따라 가두 항의를 했다. 3월1일, 타이베이시 참의회는 ‘불법담배단속 유혈사태 조사위원회’를 각계와 공동 조직하고자 초청했으며, 타이베이상업학교 랴오더슝(廖德雄) 학생은 학생대표 3인 중의 한 명이며, 기타 학생도 적극적으로 치안 유지 행동에 가담했다. 3월3일, 랴오더슝은 충의(忠義)봉사대 부총대장을 담당하며 타이베이상업학교를 제8분대로 편성하고 멍쟈(艋舺)분국의 치안 유지를 책임졌다.


타이베이 공업학교


유적지 소개

1912년, 타이완총독부는 다가나보 다안장(大加蚋堡大安庄, 현 소재지)에 민정국 학무부 부속 공업 강습소를 성립하고 1918년에 타이완총독부 공업학교를 증설해 일본학생만을 모집했다. 1923년 두 학교가 합병된 후 타이베이주립 타이베이공업학교로 개명했다. 전후에는 타이완성립 타이베이공업직업학교로 개명했다. 교사는 초기에 벽돌과 목조 구조였는데 1930년 후에는 점차 콘크리트 건축으로 개축되었고 수 차례의 보수작업을 거치면서 본래의 교사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현존하는 스시엔러우(思賢樓)는 1998년에 시에서 고적으로 지정했다.

사건과 사적

1947년2월28일, 타이베이 시민들이 불법담배단속 유혈사태에 항의하며 길거리로 나올 때 타이베이공업학교 학생들도 가두시위에 참여했다. 시위 행렬이 행정장관공서에 도달했을 때 경비병들이 총격을 가해 학생 우빙황(吳炳煌)이 총에 맞았다. 사건 후 <장관공서 앞의 총성>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이 사건의 경위가 묘사됐다.

타이베이공업학교 학생들도 타이베이시 지방 치안 유지에 적극 협조했다. 3월3일 충의봉사대 성립 후, 각 학교의 학생은 8개 분대로 편성되었고, 타이베이공업학교는 제4분대를 책임졌다.


타이완 법과상업학교


유적지 소개

타이완과 동남아지역의 경제 연구를 주로 하는 타이완총독부 고등상업학교가 1919년에 개교한 후 1926년에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로 개명했다. 1946년에는 타이완성립 법과상업(法商)대학으로 개편되었고 이듬해에는 타이완대학교 법학대학으로 편성됐다. 점토벽돌로 축조한 서양 고전식 건물이며 현 소재지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지금은 타이완대학교 부설연수학원에 속하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1998년 시 지정 고적이 되었다.

사건과 사적

1947년2월28일 불법담배단속 유혈사태로 군중들이 가두 시위를 벌일 때 일부 법상대학 학생들도 이에 가담했다. 3월2일, 옌핑대학, 타이완성립 사범대학, 법상대학 등 학교의 학생들은 중산당에 집결해 학생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또 다른 학생들은 학생군을 조직해 무장 공격을 발동하고자 준비하고 있었으며 타이완계 일본군 리중지(李中志)가 타이완대학교 의과대학 궈슈충(郭琇琮), 법상대학 천빙지(陳炳基), 옌핑대학 예지둥(葉紀東)과 연락해 3월4일에 3개의 대대를 구성했다. 천빙지가 이끄는 제1대대는 젠궈고교에서 집결하고, 궈슈충이 이끄는 제2대대는 사범대학에서 집결하며, 제3대대는 리중지와 양젠지(楊建基)가 리더로 타이완대학교 메인캠퍼스에서 집결하고, 예지둥은 옌핑대학 학생을 이끌었으며, 기타 스린(士林), 위안산(圓山) 근로자로 구성된 1개 대대가 있고, 타오위안(桃園) 방면에도 무장 대대가 있어 지원할 준비를 갖췄다. 그러나 계획은 예상에 어긋나면서 구체적 행동 없이 해산되었다. 사건 후 천빙지는 행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타이완대학교에서 퇴학 처분됐다.


옌핑 대학


유적지 소개

일본통치시기 일본 유학파 엘리트 주쟈오양(朱昭陽)은 타이완 인재 양성을 위해 1946년9월에 옌핑(延平)대학을 개교하며 학생을 모집했다. 당시 ‘카이난(開南)상공직업학교’의 교사를 일시적으로 빌려서 야간에 수업을 했었다. 같은 해 10월 개교식을 거행했다.

1947년3월, 228사건 중에 국민당정부군은 캠퍼스 내에서 무기를 수색해 냈다며 옌핑대학에 폐교 조치를 내렸다. 1948년9월 ‘옌핑고교 보습학교’라는 명의로 재개교하게 됐다. 1953년 지금의 타이베이시 젠궈(建國)남로1단에 교사를 신축하며 지금까지도 이 자리에서 존속하고 있다.

사건과 사적

1947년 228사건 기간 옌핑대학의 학생들은 치안 유지 업무에 참여했고 일부 학생은 학생군을 조직할 계획이었다. 예컨대 예지둥 등은 타이완성립 사범대학, 법상대학 등 학교의 학생과 3대대에 가담해 무장 항쟁을 준비했으나 계획은 실패해 실천하지 못했다.

3월9일, 국군 지원군이 타이베이에 진입해 옌핑대학 내에서 무기 및 ‘싱화(興華)공화국’ 깃발을 발견했다며 폐교를 명령했다. 3월20일 경비총사령부는 ‘학교 운영 부실과 입안이 불허했고 228사건기간 일부 학생이 반란에 가담해 불법이다’라는 사유로 옌핑대학을 폐교 조치했다.


처리위원회 확대 개편・각 지에서 속속 성립

1947년3월4일 오전, 타이베이시 처리위원회는 전성(全省)급 기관으로 확대 개편할 것을 결의하고 당시 17개 현.시 참의회에 처리위원회 분회를 긴급 구성하여 각 지방의 소요사태를 처리하며 대표를 천거해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전성급 처리위원회에 참석하도록 통보를 보내 각지의 처리위원회가 속속 성립됐다. 같은 날 타이완학생연맹은 중산당에서 대회를 갖고 회의 후 학생군을 결성할 의향이 있었으나 사정으로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3월5일, 타이완성 자치청년동맹이 중산당에서 발족했다. 같은 날 전성급의 처리위원회는 중산당에서 임시대회를 개최하고 조직 강령과 8개 항의 정치 근본 개혁방안을 통과했다. 3월6일 성립대회를 거행하며 개편을 완성하고 17명의 상무위원을 선출했다.


▲1947년3월5일, 228사건처리위원회 천이숭(陳逸松)이 주재한 228사건처리위원회 임시대회에서 참석한 국민대회대표, 참정원, 성참의원, 타이베이시 참의원 및 각계 대표들은 조직 강령 초안을 토론하고 8개 항의 정치근본개혁초안을 결정했다.

북부 및 동부 현.시 총 14곳에 228사건처리위원회 분회 성립, 각지의 상황은 아래와 같음

타이베이(臺北)시
  • 3월4일:타이베이시 처리위원회를 ’전성(全省)급 처리위원회’로 개편함
  • 3월5일:처리위원회 임시대회 개최, 조직강령 및 8개 항의 정치근본개혁방안을 통과함
  • 3월6일:처리위원회 사후 성립대회에서 17명의 상무위원을 선출하고 <전국동포에게 고하는 글(告全國同胞書)>을 발표함
  • 3월6일:타이베이(臺北)시 분회를 성립함
  • 3월7일:처리위원회에서 <32조 처리강령 및 10개 항의 요구> 결의, 이날 밤 천이(陳儀)에 의해 거절 당함
  • 3월8일:처리위원회 발의안 철회, <32조 처리강령 및 10개 항의 요구>는 성민(省民) 전체 의견이 아님을 성명함
신베이(新北)시
  • 3월4일:단수이(淡水) 분회성립, 참가자 대부분은 정치건설협회 성원임
  • 3월6일:반차오(板橋) 지회가 반차오 중산당에서 성립함
  • 3월7일:타이베이현(臺北縣) 분회를 성립함
지룽(基隆)시
  • 3월4일:지룽시(基隆市) 분회가 시참의회에서 성립함
이란(宜蘭)현
  • 3월5일:이란(宜蘭) 분회가 카이화루(開化樓)에서 성립함
  • 3월6일:이란 분회에서 궈장위안(郭章垣)을 주임위원으로 선출하고 5개 항의 요구 사안을 전성급 처리위원회에 제출 처리하도록 함
  • 미상:뤄둥(羅東) 분회는 치과의사 천청위에(陳成岳)가 이끌고 경찰국의 무기를 접수하며 지방 질서를 유지함
화리엔(花蓮)현
  • 33월4일:보밀국 정보 기록에 따르면 펑린진(鳳林鎮) 주민이 징을 울리며 청년을 소집해 회의를 가졌고, 같은 날 진장(鎮長) 린마오성(林茂盛)이 펑린(鳳林) 분회를성립하고 천창밍(陳長明)을 경제부장으로 하며 전단 전파를 통해 해외에서 귀국한 청년들이 청년단을 조직하도록 고취함. 처리위원회는 6일 구서(區署-행정구) 경찰서와 군용 창고를 접수하고, 7일에는 농림처 화리엔(花蓮) 농장 곡창을 접수함
  • 33월5일:화리엔(花蓮) 분회가 화리엔현 중산당에서 성립, 청년단간부 마유위에(馬有岳)가 주임위원으로 선출됐고 12개 항의 요구 사안을 제출함
  • 33월7일:화리엔 분회는 ‘비(非)유혈, 비(非)독립, 비(非)공산화’의 3개 항의 처리 원칙을 제시함
타오위안(桃園)시
  • 3월1일:보밀국 정보 기록에 따르면 중리(中壢) 분회는 장아만(張阿滿), 천더싱(陳德星), 린티엔쿠이(林添奎) 등이 성립함
신주(新竹)시
  • 3월2일:신주시(新竹市) 분회는 신주(新竹)고교에서 성립함
  • 3월5일:신주시 분회는 10개 항의 제안을 결의하고 처리위원회에 제출함
신주(新竹)현
  • 3월7일:신주현(新竹縣) 분회 성립, 총무,치안,양식 등 3부로 나뉘며 주요 책임자는 황윈진(黃運金). 사건 기간 총무부는 민간에 재물을 징수하여 치안대 유지비로 사용함
먀오리(苗栗)현
  • 3월7일:정보당국의 보고 기록에 의하면 펑춘(豐春)병원 원장, 먀오리(苗栗) 허우룽향(後龍鄉) 향장(鄉長) 차이시엔양(蔡咸陽)이 허우룽향 향민을 모아 회의를 개최하고 청년자치동맹 및 처리위원회 허우룽(後龍) 분회 성립을 결의함

반차오(板橋) 중산당


유적지 소개

1933년5월 반차오(板橋) 공회당이 낙성됐고, 1945년 국민정부가 접수한 후에는 반차오 중산당으로 개명했다. 1980년 원래 건축물이 철거되고 지금의 6층 시청 건물로 재건했는데, 반차오시공소는 1983년에 이곳으로 이전했다. 2010년 타이베이현이 신베이시(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본래의 반차오시공소는 이제 구공소-구청으로 개편됐다.

사건과 사적

1947년3월6일 오전, 200여 현지 주민과 청년들이 반차오 중산당에서 진장(鎮長) 린중시엔(林宗賢)의 주재로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 후에 처리위원회 반차오 지회를 성립하고 주임위원에는 왕이원(王以文)을, 부주임위원으로는 유스후(游石虎)를 각각 천거하는 한편 반차오진(鎮) 보안대를 결성해 지방 치안을 유지했다.


단수이 중고교


유적지 소개

1882년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 조지 레슬리 맥케이가 후웨이(滬尾-현 단수이)에 ‘옥스포드 학당(牛津學堂)’으로도 불리는 ‘이학당 대서원’을 설립했다. 1914년 맥케이의 장남 조지 윌리엄 맥케이 목사는 옥스포드 학당 원 소재지에 단수이(淡水) 중학교를 설립하여 1922년 ‘사립 단수이 중학’으로 개명하고 1925년 지금의 소재지(원 교사 옆)로 이전했다. 1936년 타이완총독부가 접수하여 ‘사립단수이중학교’로 개명했고, 1947년4월에는 ‘사립단쟝(淡江)고급중학(고교)’으로 개명했다. 2007년, 단쟝중학 교정에 ‘푸딩(埔頂)228희생자 기념비’를 설치했다.

사건과 사적

228사건 발생 후 일부 시민은 단수이중학에 진입하여 일본통치시기 교련용 총을 탈취해 단수이 근교의 수비군을 공격하려 했다. 1947년3월10일, 국군이 단수이에 진입했는데 단수이중학 학생 궈샤오중(郭曉鐘)이 친구를 찾으러 길거리에 나갔다가 공격을 받아 죽고 그의 시신은 길거리에 버려져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교장 천넝퉁(陳能通)과 훈도주임 황아퉁(黃阿統)은 궈샤오중 학생의 시신을 거두어 학교에 안치했다. 다음 날 오전 황아퉁은 궈샤오중의 시신이 걱정되어 교내 기숙사를 나섰는데 도중에 군대가 교내에서 학생을 수색하다가 성과가 없자 천넝퉁과 목사 천왕(陳旺-천넝퉁의 부친) 등 3명을 강제 연행해 갔다. 천왕은 12일 오후에 석방됐고, 천넝퉁의 딸은 물리화학 선생 루위안(盧園)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루위안은 그 소식을 듣고 외출 도중 사병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고, 황아퉁과 천넝퉁은 그 후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관두푸딩


유적지 소개

관두(關渡) 푸딩(埔頂)은 오늘날의 단수이구 푸더리(福德里)이다. 즈창(自強)초등학교 사제들이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푸딩의 사형장은 마주스(媽祖石) 근처와 즈창(自強)신촌 아래 빈터 등 두 곳에 있다고 한다. 마주스는 지금의 단수이구 주웨이(竹圍)초등학교 즈창 분교 내에 있으며, 비석은 1913년에 문자를 새겼고 2002년에 시 지정 고적이 되었다. 마주스 맞은 편은 원래 즈창신촌 소재지인데 지금은 철거되었다.

사건과 사적

관두 푸딩는 228사건 당시 국민당정부 군대가 살인과 시신을 유기했던 곳이다. 푸더리 어르신 후신싱(胡新興)의 말에 따르면 228사건 당시 군인이 십여 명을 차로 데려와 푸딩지역에서 총살시켰다고 한다. 이 외에 단수이진(鎮)공소 직원 우유더(吳有德)와 잡화상 우펑(吳彭), 근로자 린아허(林阿和)가 모두 3월 중에 자택에서 군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3월15일 관두 푸딩에서 총살을 당해 시신은 유가족들이 거둬갔다고 전했다.


단수이 사룬



유적지 소개

단수이(淡水) 사룬(沙崙)은 일본통치시기에 해수욕장으로 개설되어 1919년부터 운영했고 1950년에 폐쇄됐던 바 있다. 1961년에 단수이진(鎮)공소와 타이완성(省) 도로국(公路局)이 군부 용지 옆에 해수욕장을 재개하였는데 1999년에 다시 폐쇄됐다.

사건과 사적

단수이 사룬은 228사건 당시 국민정부 군대가 살인과 시신을 유기했던 곳이다. 1947년 3월11일 군대가 단수이중학교에 진입해 학생을 수색했으나 발견하지 못해 학교 교장 천넝퉁과 목사 천왕, 훈도주임 황아퉁 등 3명을 당일 사룬해수욕장으로 연행해 가서 3그루의 나무에 각각 묶어뒀다가 12일 오후에 천왕을 석방했다. 며칠 후 다른 두 명은 손을 뒤로 묶어 군용 트럭으로 지룽 방향으로 데려갔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었는데 그 후로 이들 두 명은 행방불명됐다. 요리사 황량안(黃兩岸), 근로자 천완성(陳萬生), 세관 노동자 웡천수충(翁陳樹欉), 베이터우(北投)육군병원 원장 라이헝탄(賴亨炭) 등도 군경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어 단수이 사룬 해변에서 총살됐다.


군중의 시청 포위・대(大)신주현(新竹縣) 타오위안(桃園)지방의 항의

228사건 폭발 후, 소식이 인근의 신주지역으로 신속하게 알려져 각지 시민들이 행정장관공서의 시책에 불만하면서 잇따라 항의행동에 동참했다. 전후 초기 신주현 관할 범위는 다소 넓어 지금의 타오위안시, 신주현과 신주시 및 먀오리현(苗栗縣)이 포함되었는데 당시 신주현 현청은 지금의 타오위안역 역전앞 상권이 있는 타오위안시 중정로(中正路)에 위치했었다.

1947년2월28일 타이베이의 시위 항쟁 소식이 신주지방에 전해지면서 시민들은 경복궁(景福宮-도교 사원)에 모여 절 앞 광장에서 시정에 대해 논의하며 탐관오리를 타도하자는 요구를 했다. 신주현청은 이 소식을 접하고 경찰 중대를 파견해 집회를 해산시키자 군중의 격한 분노를 초래했다. 다음 날 오전 30여 명의 학생과 청년이 타이베이를 출발해 타오위안에 도착해 현지 청년들과 회동하고 정당과 정부기관에 공격을 가했고 철도보안경찰의 무기를 먼저 접수한 후 타오위안기차역도 접수하여 가오슝(高雄) 펑산(鳳山)에서 올라와 타이베이의 진압을 지원하는 군대를 막으려고 상행열차 운행을 저지하고자 했다.


타오위안 역


유적지 소개

타오위안 기차역은 1893년에 설립된 것으로 당시 ‘타오아위안(桃仔園) 정차장’이라 불렸다. 1905년 종관선(縱貫線-상하행) 노선이 변경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목조 건물으로 타오위안 기차역을 건설하고 ‘타오위안 역’이라 개명했다. 1962년에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으로 개조했다.

사건과 사적

1947년3월1일 오전, 30여 명의 타이베이 청년이 타오위안에 도착해 현지 청년단과 회동하고 정부기관에 대한 공격을 전개했다. 가장 먼저 철도보안경찰의 무기를 접수했고, 상행 열차를 막아 가오슝 펑산에서 타이베이 시민을 진압하러 파견된 국민당정부 군대을 저지했다. 청년은 타오위안 기차역을 접수한 후 지방 주민들은 외성인(外省人-중국대륙 각 지방 출신)을 수색하기 시작해 수많은 외성인은 본성인(本省人-타이완출신자) 친구 집이나 신주현 경찰서로 피신했다.


신주현정부


유적지 소개

이곳은 원래 1904년 낙성한 타오아위안(桃仔園)청사 건물이었다. 타이완 총독부 영선과 기사 오노키 다카하루(小野木孝治)가 설계한 물막이 판을 이용해 축조한 양옥을 모방한 목조 구조였다. 1920년 지방 행정 조직이 가장제(街庄制-행정구역 명칭)로 개편되고 타오아위안청사는 타오위안(桃園)군역소(郡役所)로 개편되고 2층 양옥 벽돌 구조의 건물로 개조하였는데 건축입면은 타일과 세척자갈 등 건축자재를 채택해 1922년에 준공됐다. 2차 대전 후에는 신주현청으로 사용됐고 1950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된 후에는 타오위안현정부 사무 청사가 되었다. 그후 원래 건축물이 철거되고 현대화 건축으로 재건됐다.

사건과 사적

228사건 소식이 타오위안지역에까지 전파되면서 1947년3월1일 오후 군중은 외성인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현청 등 행정기관에 모여들어 사건 발생 전의 부정부패 관리를 색출해 내어 경복궁으로 데려가 대중에 사과하도록 하려 했다. 당시의 현장(縣長) 주원버(朱文伯)는 농림 사무를 보러 타이베이에 갔고 현장 대행이 폭동을 진정시키고자 지방 유지를 소집해 협상했으나 군중이 시청에 집결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또 다른 일부 군중은 현청 창고에 진입해 쌀과 우유를 운반해 나가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신주현경찰국 타오위안 파출소 분소


유적지 소개

원래는 1927년에 건축한 동본원사였는데 2차 대전 후 타오위안(桃園)파출소 분소가 건물을 접수해 사무 청사로 사용했고, 이어진 수 차례 증개축을 거쳐癌 1950년대 초반에 원 건물을 철거했다. 신축 사무 청사는 1955년에 낙성해 1979년에는 1970년대 경찰 청사 표준 양식에 부합하는 건물로 개축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2018년에 타오위안시 신주민문화회관으로 설치했다.

사건과 사적

228사건 소식이 타오위안지역에까지 전해지자 1947년3월1일 오후 민중이 외성인을 공격하기 시작해 수많은 외성인들이 신주현(新竹縣)경찰서 타오위안 파출소로 피신했다. 일부 청년과 학생은 따라서 파출소 분소를 포위하며 탐관오리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나 군경이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민중은 공군 창고를 공격해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여 다시 파출소 분소를 찾아가 경찰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군경은 이를 거절하며 기관총과 소총으로 민중을 향해 사격해 사상자를 냈다. 밤에도 경찰과 민중 간의 대치는 계속됐고, 경찰측은 정세가 불안해 타이베이에 있는 성(省)경무처에 지원을 요청했다. 새벽 2시, 타이베이의 지원군이 도착하고 경찰국 내의 인원들은 혼란한 틈을 타서 뒷문으로 도망 나와 지원군과 함께 북상했다.


타오위안 경복궁



유적지 소개

개장성왕(開漳聖王-중국 푸젠성 장주지방 사람들의 수호신, 도교 신앙)을 모시는 경복궁은 1745년에 세워졌으며 ‘성왕묘(聖王廟)’라고도 부른다. 1813년 젠위에(簡岳) 등 지방 신도들이 규모와 화려함을 겸한 건축으로 재건했다. 경복궁은 타오위안시(桃園市) 중심지에 있는 타오위안시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찰이다. 2차 대전 후 수 차례의 개보수와 증축을 거쳤고 건축물은 전반적으로 잘 보전되어 있다. 1985년에 시 지정 고적으로 등재됐다.

사건과 사적

228사건 소식은 당일 이미 타오위안지역에 전해져 1947년2월28일 저녁 민중은 경복궁 앞 광장에 모여 행정장관공서의 악행을 비판하며 탐관오리를 타도할 것을 요구했다. 신주현청은 이 소식을 접하고 경찰대대를 파견해 민중을 해산시켰는데 이는 오히려 민중의 더욱 격한 분노를 샀다. 3월1일 오후, 청년들이 신주현청을 공격해 관리과 지방 유지를 경복군으로 데려가 그들로 하여금 무릎 꿇고 민중을 향해 사죄하도록 했다. 학생대는 경복궁 사찰 입구에 지휘부를 설치했고 고향 보위대(保鄉隊)도 이곳에서 집합했다.


군중 의정・신주(新竹) 먀오리(苗栗)

타이베이시는 1947년2월28일 오후에 임시 계엄을 실시하는 동시에 경비총사령부는 가오슝(高雄) 펑산(鳳山)에 있는 군대를 신속하게 북상하도록 하였다. 군대는 3월1일 새벽 신주(新竹)에 도착할 때 타이완인 기차 운전사가 도주해버려 군대는 부득이 신주시에 잠시 머물게 됐다. 사건 이전에 이미 신주시장 궈샤오중(郭紹宗)이 부정부패라는 의심을 받았었기에 신주시민은 타이베이에서 충돌 사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호응하고 성황묘(城隍廟-청황묘, 도교 사원) 부근에 모여들었다.

3월2일, 군중은 신주시청과 신주지방법원 및 공무원 기숙사 등 행정기관을 포위했으나 관리들이 이미 도주한 뒤였고 시장은 경찰이 헌병과 함께 출동해 진압하도록 경찰국에 명령했다. 오후 3시 경 헌병과 경찰은 항의 군중과 아키라 바시(욱교-旭橋)다리 근처에서 마주쳤다. 민중은 헌병과 경찰에게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했는데 헌병과 경찰은 이에 기관총으로 난사해 적어도 8명이 죽고 10명이 부상했다.

신주의 지방 유지들은 참의원 장스구(張式穀)를 주임위원으로 하는 228사건처리위원회 신주시 분회를 신주 중고교에 성립하고 분쟁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처리위원회 신주시 분회는 신주시청에 ‘외성인은 이번 손실에 대해서 더 이상 손해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번 폭동에 참여한 자에 대해서는 면책해 준다’, ‘현장.시장은 바로 민선으로 뽑는다’, ‘경찰은 바로 무장을 해제한다’, ‘주둔군은 시내에서 철수한다’, ‘본(신주)시에서 차를 대기 중인 군대는 타이베이에 지원하러 가지 않는다’ 등의 6개 요구 사항을 제출했다. 이에 시장 궈샤오중은 앞의 2개 사안만을 수긍했다. 3월3일부터 시내의 질서는 점차 회복되었고, 5일에는 처리위원회 신주시 분회가 10개 항목의 정치개혁사안을 제출했으며, 분회는 6일 시내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남부로 쌀과 고구마를 구매하도록 대표를 파견했다.

신주 태생의 타이완인 장교이며 당시 신주 방위사령부사령 수샤오원(蘇紹文)은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천티엔덩(陳添登), 정줘헝(鄭作衡), 정젠뱌오(鄭建杓) 등 연행된 참의원들의 보증인이 되어줬고 군경의 사살행위를 금지하여 신주지역이 받은 충격은 다소 완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시민은 동란 속에서 체포되거나 생명을 잃었다.

먀오리(苗栗)지역에서도 산발적 충돌이 발생했다. 펑춘(豐春)병원 원장, 허우룽(後龍)향 향장 차이시엔양(蔡咸陽)은 형국을 감안해 향민대회를 열었다. 향민대회에서는 현지 치안 유지를 위해 처리위원회 허우룽 분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신주도 성황묘


유적지 소개

신주(新竹)성황묘(城隍廟-도교 사원)는 1748년에 낙성한, 타이완에서 품계가 가장 높은 성황묘이며 현지인들의 중요한 집회장소이다. 현존 앞전(정전) 돌벽 조각은 대부분 1924년에서 1926년 사이에 만들어 진 것이다. 성황묘의 주체 건축의 보전 상태는 양호하며 1985년에 시 지정 고적이 되었다.

사건과 사적

1947년3월2일 오전, 민중들은 성황묘에 모여 항쟁 행동을 전개하였다. 외성인이 경영하는 푸싱건설회사(福興營造公司)와 중화싱(中華興雜貨店)잡화점의 화물을 불태우고 외성인을 구타했다. 이 두 상점은 아마도 중국 관료와의 왕래가 비교적 밀접하여 이들 상점에 들어가 분을 푼 것으로 사료된다. 그후 군중들은 법원, 시청 등 기관 및 공무원 기숙사를 처들어갔다.


신주시정부


유적지 소개

1926년에 낙성한 신주주청(新竹州廳) 청사는 2차 대전 후 신주시정부 청사로 개편됐다. 1950년 행정구역의 재구획에 따라 원래 신주주(新竹州)를 타오위안(桃園-약칭桃), 신주(新竹-약칭竹), 먀오리(苗栗-약칭苗)의 3개 현(縣)으로 구획하면서 신주시를 현할시(縣轄市)로, 원래 건물은 신주현(新竹縣)정부(현청)로 개편했다. 1989년 현청이 주베이(竹北)로 이전된 후 지금까지 이 건물은 신주시청으로 쓰이고 있다. 1998년 국가 고적으로 지정되었으나 1999년 921대지진 때 훼손되어 5년 간의 보수 공사를 거쳐 2005년에 보수 공사를 마쳤다.

사건과 사적

1947년3월2일, 민중들은 신주 성황묘 앞에 모여 항의를 하고 가두를 따라 정부기관을 파괴하고 공무원을 공격했다. 시청도 군중의 공격을 받아 시청 관리들은 일찍이 도피했고 군경은 사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군중은 후에 시청 부근 아키라 바시(旭橋) 다리에 집결하면서 군대와 시민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사병이 돌연 총을 쏴 일부 민중은 다리밑을 통과해 시청 쪽으로 피신해 갔다.


타이완 신주 지방법원


유적지 소개

1896년 타이완 총독부가 청나라 단수이 관청(淡水廳署衙門)을 접수해 타이베이현 신주지청(新竹支廳)으로 사용했는데 지청장 마츠무라 유노신(松村雄之進)이 복도 메인홀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원래 관청 감방을 교도소로, 대청은 타이베이지방법원 신주지부로 각각 사용했다. 1938년 신주지부가 신주지방법원으로 개편되면서 신주주(新竹州)를 관할하며 신주주청(州廳)과 함께 신주지역의 양 대 기관으로 자리했다. 1945년 국민당정부가 접수한 후에는 신주지방법원으로 개명했고 2017년에 이르러 신축 사무 청사로 이전을 하면서 원래 건물에는 신주지방법원 간이법정을 설치하였다.

사건과 사적

1947년3월2일 오전, 군중들이 성황묘 부근의 회사, 잡화상의 화물에 불을 지르고 법원, 시청, 경찰서, 전매국 등 정부기관 및 공무원 기숙사를 공격하고 법원 판사, 민정과 과장, 지정과(地政科) 과원 등 여러 명을 구타했다. 목격자 홍쉬란(洪旭然)은 228사건 전에 법원 내부 직원 모두 푸저우(福州-중국 푸젠성 성도) 사람이며 어떤 이는 온가족이 다 법원에서 일했다며, 그래서 228사건 중에 법원이 민중의 공격을 받았고, 일부 민중은 법원 맞은 편의 기숙사에 진입해 검찰관을 폭행하며 가구를 불 태웠다고 밝혔다.


228사건처리위원회 신주지부


유적지 소개

타이완총독부는 1922년에 신주주립(新竹州立) 신주중고교를 설립했으며 1945년 국민정부가 접수한 후 타이완성 신주중고교로 개편했고 1970년에는 신주고급중학(고교)으로 개명했다. 학교의 검도관(일본통치시대의 신주 무도관)은 2001년에 시 지정 고적으로 등재되었는데 건축 양식의 보존이 양호한 타이완 유일의 일본통치시대 벽돌 건축의 검도관이다.

사건과 사적

1947년 3월2일 저녁, 시 참의원은 각계 인사를 신주 중고교로 초청해 228사건 처리위원회 신주시 분회를 성립했다. 분회에는 총무부, 정무부, 식량부, 처리부, 치안부 등의 부문이 있고 장스구(張式穀)를 주임위원으로 선출했다. 3월4일 신주시 분회는 시장 궈샤오중(郭紹宗)에게 총 쏜 사람을 엄벌에 처하고 주둔군은 시내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는데 시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무부장 천티엔덩(陳添登-당시 신주시 참의원)은 분회 회의에서 학생과 교원이 ‘치안대’를 구성해 질서를 유지할 것을 발의하는 한편 집무에 사용할 수 있도록 무기를 제공해달라고 시청에 요구했다.

3월7일, 리스수(李世薯)가 주재하고 청년 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타이완성 자치청년동맹 신주분회가 신주중고교에서 성립됐다. 같은 날 신주방위사령 겸 신주현장(縣長) 대행 수샤오원(蘇紹文)은 ‘치안대’를 ‘치안봉사대’로 개명하고 처리위원회 신주시 분회에 편성시켰다. 3월12일 오후, 처리위원회 신주시 분회와 치안봉사대가 폐지됐다.


신주 아키라 바시



유적지 소개

쉬차오(旭橋-욱교, 아키라바시)는 청나라 주치엔(竹塹)성의 해자를 건너는 다리로 일본통치시대에 출판한 <신주시 요람(新竹市要覽)>에서 아키라바시가 표기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2차 대전 후 다리 이름은 청공교(成功橋-성공교)로 개명했다. 2015년 신주시청은 기차역 앞 광장에서 쉬차오 부근의 동먼(東門-동문)의 해자 사이를 친수(親水)공원으로 만들고자 개조 공사를 진행했다.

2004년2월28일, 다리 근처에 신주시 228평화기념비를 설치했다. 기념비 옆 비문에는 백색공포시기에 리즈숭(黎子松)이 학생 푸루즈(傅如芝)에게 써준 시 <남방의 목면화>가 새겨져 있다.

사건과 사적

1947년3월2일 오후 3시, 민중들은 아키라바시 주변에서 지속적으로 항의를 하고 있었으며, 현지 군대는 군경과 무기를 실은 트럭을 출동시켜 아키라바시에서 군중을 향해 권고하였고, 군중은 군경이 무기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군경은 기관총으로 난사했다. 일부 군중은 다리밑으로 뛰어내리고, 해자 바닥으로 피신했는데 당시 8명이 당장 사살되었고 수십 명이 부상했으며 이중 8명은 중상을 입고 끝내 숨졌다. 이는 신주지역에서 발생한 가장 참혹한 사건이기도 하다.


허우룽 역


유적지 소개

1922년 해선(海線)노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허우룽역(後龍驛)이 설치되었으며, 1945년 국민당정부가 접수한 후에는 허우룽기차역(後龍車站)이라 개명하고 신주운무단(運務段)에 편성해 여객과 화물 운수 업무를 보는 3등 역으로 사용되다가 1984년에 폐지됐다. 원래 역사는 목조 건물이며 역장 사무실, 매표실 겸 짐 보관소, 대기실, 승강장, 창고, 화장실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1970년에 기차역이 재건되면서 원래 건축물은 사라졌다.

사건과 사적

1947년3월2일, 허우룽역에서 탄약을 운송하는 두 명의 사병이 타이중(臺中)에서 타이베이역으로 향하던 수십 명의 여객들에게 포위돼 공격을 당해 그중 사병 한 명이 당장 맞아 죽었고, 다른 한 명은 군중을 향해 사격을 하자 군중들이 원래의 열차를 이용해 신주로 향했다. 허우룽역에서 열차 배치를 책임졌던 역무원 왕진딩(王金定)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228사건 후 룽강(龍港)군기지 사병에게 체포돼 신주헌병대로 압송되어 2개월여 동안 구금돼 고문 조사를 받았다. 상인 양창구이(楊昌貴)는 3월2일 허우룽역을 지날 때 체포된 후 행방불명됐다.


타이베이 시내 진압

1947년3월1일,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는 오후 12시를 기해 계엄을 해제한다고 선포했지만 집회 시위는 여전히 금지했다. 3월3일, 경비총사령부는 정부는 시민의 요구를 수락했으며 ‘평화적이며 관대하게 처리했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행정장관 천이(陳儀)는 사실 진압을 준비하며 이미 난징(南京)에 파병을 요청했다.

3월8일 저녁, 재편부대 제21사단이 지룽항에서 상륙했다. 장관공서와 경비총부는 이날 밤 10시30분 중산당, 르신(日新)초교에서 회의 중인 228사건처리위원회 주요 성원을 공격 및 체포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3월9일 새벽6시 커위안펀(柯遠芬)은 라디오방송을 통해서 타이베이와 지룽의 계엄을 선포했다. 다음 날 천이(陳儀)는 방송을 통해 타이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처리위원회 및 타이완성 정치건설협회 등 ‘불법단체’를 해산하도록 명령했다. 경비총부는 ‘민중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고 228사건은 ‘소수의 음모자들이 기회를 이용해 정권을 탈취하고 국가를 배반하고자 타이베이의 어느 한 구석을 시작으로 라디오방송국을 점령하여 사실을 왜곡하며 과장된 표현으로…., 그래서 전성(省)의 행정관리들이 위협을 받거나 구타와 모욕을 받았고, 정부기관은 점령되거나 파괴되고, 외성출신 공무원과 사업 차 타이완에 온 사람은 재물을 탈취 당하거나 부상을 입어 불구가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처리위원회의 주요 성원을 체포하라 명하고 이어서는 경비총부는 유화와 소탕 숙청을 실시하며 전 타이완지역에 대한 진압을 전개했다.

3월20일 경비총부는 타이베이, 지룽, 신주, 중부, 남부, 마공(馬公-펑후섬 소재) 등 6개 구에 유화사령부 설립을 선포하고 다음 날부터 유화와 소탕 숙청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타이베이 유화구는 헌병 제4단 단장 장무타오(張慕陶)가 타이베이시와 타이베이현 경내 일부 향.진, 동쪽의 시즈(汐止)에서부터 서쪽의 주웨이향(竹圍鄉), 남쪽의 반차오(板橋)에서부터 북쪽의 차오산(草山-즉 양명산陽明山),베이터우(北投),단수이(淡水) 사이를 관할했다.



▲육군 재편부대 제21사단 제146여단은 대(大)신주현의 신주 유화구를 책임졌다. 이 구역은 1분구에서 3분구까지 총 3개의 유화 분구로 나뉘어졌는데 그림은 제1 유화 분구 아래 또 제1에서 제4의 경계구의 병력 배치 범위를 세분해놓은 이미지이다.


헌병 제4여단


유적지 소개

이곳은 본래 1918년 린칭위에(林清月)가 개설한 홍지(宏濟)병원이며 후에는 타이완총독부가 갱생원으로 개조해 1930년에 완공했다. 이곳에 아편과 마약 중독자를 수용하여 의학박사 두총밍(杜聰明)이 원내 업무를 책임졌다. 2차 대전 후 1945년 11월, 갱생원은 헌병사령부 제4여단이 주둔하고 타이완에서 투항한 일본군을 주로 감시하며 경찰의 질서유지를 협조했다. 1950년 헌병사령부는 타이베이에서 재편성되면서 이곳에 자리하게 됐고, 헌병대가 체포한 정치범들을 이곳에 감금했었다. 1957년 헌병사령부가 이전해 나간 후 ‘광복대륙설계연구위원회’가 들어선 후 1991년까지 사용했었다. 본래 건물은 1995년에 철거되어 사설주차장과 사무빌딩으로 개축했다.

사건과 사적

228사건 중에 헌병 제4여단은 지룽요새부대를 따라 1947년3월8일 군대가 상륙한 후 함께 지룽시내를 소탕했다. 3월10일 계엄 선포 후 헌병 제4여단은 장무타오를 단장 겸 북부 유화구 사령으로 하여 북부 유화구의 숙청 소탕 임무를 책임졌다. 228사건 기간 타이완지역 사형수들의 총살은 대부분 헌병 제4여단이 집행했었다.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 제2처 경비대대 구치소


유적지 소개

1895년 일본 불교 조도슈 오다니하(淨土宗大谷派)는 일본군을 따라 타이완으로 건나와 포교했다. 신도들이 증가하며 1928년에 ‘히가시 혼간지 타이베이 별원(東本願寺臺北別院)’을 지었는데 1930년에 불에 타 없어졌다. 1932년 승려들이 일상에 필요로하는 절의 부엌과 거실을 우선 지었고, 1936년에는 철근 콘크리트 건축의 본당을 재건했다. 2차 대전 후 1945년에는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 제2처(處)가 범인을 가두는 곳으로 점용했다.

1967년6월 히가시 혼간지를 철거하고 3채의 상업빌딩으로 재건했다.

사건과 사적

228사건 중에 경비총부에 의해 체포된 사람은 대부분 이곳에 구금되거나 고문 조사를 받았다. 예컨대 수난자 궈궈춘(郭國純)은 1947년3월10일 신원 불명의 사람이 그의 타이베이시 자택에 들어와 수색하고 그를 체포해 히가시 혼간지로 압송해 가두고, 나중에는 군법국에 이송하여 앞뒤로 반 년이나 구속하며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사건 중 이유 없이 사라진 리루이한(李瑞漢), 린리엔중(林連宗), 스지앙난(施江南), 린마오성(林茂生) 등의 가족들은 과거에 히가시 혼간지에 가서 가족의 행방을 찾아봤으나 아무런 소식도 얻지 못했다.


타이완고등법원


유적지 소개

원래 이 자리는 청나라 때의 무묘(武廟)였는데 1929년 타이완총독부가 무묘를 철거하고 법원으로 재건했다. 이 건물은 총독부 영선과 과장 이데 가오루(井手薰)가 설계해 1934년에 완공된 것이다. 타이완 총독부 고등법원, 검찰국, 타이베이 지방법원 등 3개의 사법기관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며, 이곳은 일본통치시대에는 최고위급 사법기관이었다.

2차 대전 후 국민당정부 군대가 이곳을 접수하여 ‘타이완 고등법원’으로 개명했다. 1949년에는 사법원, 최고법원, 행정법원, 공무원징계위원회가 이곳으로 옮겨와 사무를 보면서 ‘사법 빌딩’이라 이름했다. 1977년에는 원래 건물에 한 층을 더 올린 4층을 증축하여 대법관 사무실과 헌법 법정으로 사용했다.

사건과 사적

228사건 기간 타이완고등법원 판사 우홍치(吳鴻麒)는 법원 사무실에서 국민당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1947년3월16일 그의 시신은 난강교(南港橋) 다리 밑에 유기된 채 발견됐다. 228사건 후 고등법원과 관할 지방분원은 ‘불순분자’, ‘반란범’ 등을 기소하고 심판하는 일을 책임졌다.

본회에서 심사한 228사건 피해 안건에 따르면 사건 당시 고등법원(분원 포함)에 의해 ‘유기징역형’을 선고 받은 안건은 21건, 이중 7건은 ‘집행 유예’이며, ‘무죄’ 판결은 6건, ‘불기소 처분’은 7건이다. 고등법원이 최종 심사 종결한 228 관련 안건은 총 34건, 이중 14건은 유기징역 판결을 받았다.


타이베이 식물원


유적지 소개

1895년 타이완총독부는 타이완의 삼림의 특성을 조사하고 조림 방침을 책정하기 위해서 샤오난먼(小南門)의 육군 용지를 묘포지로 선정했다. 1900년 샤오난먼 성문 밖 룽샤커우좡(龍匣口庄)에서 12,953평의 농지를 구입해 ‘타이베이 묘포’라 불렀다. 1921년에는 ‘타이베이 식물원’으로 개명하고 원내에 무덕전(武德殿), 공진회(共進會)상품진열관, 건공신사(建功神社) 등 식물 연구와 관련 없는 일부 단위들도 들어섰다.

1946년 무덕전은 장관공서 선전위원회의 영화촬영장으로 개편됐다. 바아충시(白崇禧)가 민심을 가라앉히러 타이완에 왔을 때 이곳을 참관했었다. 후에 철거되어 지금의 농업위원회 주차장으로 재건됐다. 건공신사 자리는 1955년에 국립중앙도서관이 들어섰고, 1973년에 도서관이 이전해 나가면서 국립교육자료관으로 개편되었으며, 지금은 국립타이완예술교육관으로 쓰이고 있다. 공진회상품진열관은 개축하여 국립역사박물관을 설치했다.

사건과 사적

1947년3월8일 재편부대 제21사단이 상륙한 후 타이베이식물원은 사병들이 시신을 유기하는 장소 중의 하나로 쓰였다. 희생자 린리챵(林麗鏘)은 3월9일에 큰누나 집을 나선 후 소식이 끊겨 가족들이 각방으로 수소문했다. ‘식물원 안에 적지 않은 시신들이 있다고 들어서 식물원에 가서 찾아봤는데 참혹한 모습의 수많은 시신이 나무 밑에 있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식물원을 지나가는 도중 군경에게 잡혔다. 동먼(東門)시장에서 이불 가게를 경영하는 희생자 천펀양(陳糞陽)은 3월9일 새벽 식물원 정문을 지날 때 이유 없이 국민당정부군에 의해 사살됐다.

1947년 중국 난징(南京) <다강바오(大剛報)> 신문사 기자 탕시엔룽(唐賢龍)의 저서 <타이완사변 내막기(臺灣事變內幕記)>에 따르면, 그는 1947년3월12일 타이베이 길거리에서 한가롭게 거닐 때 식물원 밖 길거리에 3구의 시신을 목격했는데, 그 중 두 명은 신문배달원과 우유배달원을 하는 젋은 학생들이고, 식물원 내 나뭇가지 사이에는 십수 구의 살이 터져 범벅이 된 몸덩어리가 걸려있었다’고 기록했다.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 노동교육대


유적지 소개

타이완성 경비총사령부 노동훈도영(勞動訓導營)이 소재한 이곳은 원래 일본군사용지로 일본통치시대 말기에 타이베이 제1청년특별단련소로 개설했고, 2차 대전 후 경비총사령부가 접수한 후 1946년 4월에 노동훈도영 설치에 착수해, 6월1일에 훈육 교도를 개시했다. 노동훈도영의 설립 목적은 사회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하고 교양 없는자, 직업이 없이 놀며 지내는 사람을 주로 수용하였고, 이곳은 경비총부 참모장 커위안펀이 감독했다.

사건과 사적

228사건 유화 및 소탕 숙청 기간 경비총사령부는 ‘비주요 폭도’를 노동훈도영으로 이송해 관리하며 교도했다. 1947년3월16일 경비총사령부는 ‘사건에 참여한 폭도를 명확히 규명하여 중대한 죄악에 대해서는 엄하게 형벌하는 것 외에 기타는 경비총사령부 다즈(大直)본부 노동훈도영으로 보내 관리 교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바 있다. 이 외에 본회에서 심사 종결한 피해자 배상금 신청 안건 자료에 따르면 약 338명이 이곳으로 이송돼 관리 교도되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희생자의 시신 유기 장소

228사건 후 타이베이 단수이강(淡水河) 유역의 가와바다교(川端橋-현 중정교)와 타이베이교 및 다컹계(大坑溪) 유역의 난강교(南港橋) 다리 밑에 여러 구의 물위로 떠오른 시신들이 발견됐는데, 이는 사건 중에 진행된 진압이 그만큼 비참하고 끔찍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가와바다교


유적지 소개

가와바다 바시(川端橋)는 1937년에 건설했으며 2차 대전 후 중정교(中正橋)로 개명하고 1960년대와 70년대에 교량의 교면 교폭 확장 등 수 차례의 재건을 하였는데 교각은 그대로 덮여뒀다. 2015년에 역사 건축물로 지정되었다. 2019년부터 중정교 철거 작업을 진행하며 재건 공사를 실시할 때 본래의 교각을 보류하고 옆에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 본래의 다리는 행인과 자전거가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

사건과 사적

가와바다 바시 인근의 구팅(古亭)과 공관(公館) 일대는 228사건 기간 국민당정부군이 살인과 시신을 유기한 장소였다. 피해자 유가족 린리산(林麗珊)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발생 시 타이완대학교에 재학 중인 남동생 린리챵(林麗鏘)을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가와바다 바시와 신디엔계(新店溪) 일원에서 동생의 종적을 찾아보면서 물위로 떠오른 수많은 시신을 강물과 강변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또 다른 피해자 유가족 황위예(黃玉葉)는 사건 발생 때 가와바다 바시 뱃사공이 다리 밑에서 손발이 뒤로 묶여있고 시신은 부어올라 변형된 시신을 발견했다고 하여 가서 확인해 보니 남편 천푸(陳福)의 시신이었다고 증언했다.


타이베이교


유적지 소개

타이베이교는 단수이강 하류에 위치해 있는 타이베이시와 신베이시(新北市)의 산충(三重)과 신좡(新莊)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1889년에는 목조 다리였는데 1897년 태풍으로 무너져 1925년에 당시 경비 일본 엔화 44만엔, 공사기간 3년 반, 교각 교동 7개, 총길이 434.5미터의 철교로 재건했는데 다리의 교면 중앙은 고속차선, 양 옆은 행인보도이다. 1960년 타이베이교의 부식 문제가 날로 심각해져 철거해 다시 지어 1969년 4차선 시멘트 다리고 개축했다. 1996년 교통 부하가 날로 커져 6차선 도로로 개축하고 주교(主橋) 양측에 변교(邊橋)를 신축해 지금까지 차량이 통행하고 있다.

사건과 사적

단수이강을 가로지르는 타이베이교 다리 밑은 228사건 중에 국민당 정부군이 살인과 시신을 유기하는 곳이었다. 후충훠(胡聰火)는 부친 후순(胡順)을 찾는 과정 중 다리 밑에 물위로 떠오른 시신이 여러 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제16수문 쪽에서 매일 하나 둘씩 물위로 떠오른 시신이 있는데 양손은 철사로 뒤로 묶여있고 목에는 돌이나 벽돌이 걸려있으며 의상은 흐트러져 속옷만 입었고 물에 오래 빠져있어서 살은 부어올라 거의 삭아버린 상태였다’며 ‘단수이강변에 한 1주일 정도 이름 모를 젊은이로 보이는 시신이 떠올랐는데, 단수이강의 뱃사공이 시신을 건져 강변에 뒀다’면서 ‘그 시신들은 찾는 사람이 없어서 나중에는 대부분 리어카로 옮겨갔는데 건져 올리지 않고 그대로 바다로 떠내려간 시신은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다리 어귀 쪽에 떠오른 시신은 더욱 많은 것으로 기억하며 숭산(松山) 지룽하(基隆河) 일원에도 물위로 떠오른 시신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른신들에 의하면 철사와 돌이 이용됐으니 어찌 살아남겠느냐고 하셨다’고 말했다.

본회에서 심사한 보상 신청 명단 중에 다리 부근에서 이유 없이 고문을 당하거나 총살을 당한 일반 시민이 여러 명 있다. 피해자 린이지(林義吉)는 국군에 체포된 후 의도적으로 타이베이교로 데려가 구타하고 자상을 입힌 후 단수이강에 빠트려버려 그후 긴 세월 동안 병고로 시달렸고 농사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난강교



유적지 소개

난강교(南港橋)는 다컹계(大坑溪)를 가로지르는 난강에서 시즈(汐止)와 지룽(基隆)으로 통하는 주요 도로이다. 다리는 수 차례 개축하였다. 228사건 기간 난강교는 시신 유기 지점 중의 하나로 현지 주민은 다리 밑에서 8구의 시신을 발견한 후 다리 이름을 ‘팔선교(八仙橋)’라고 부르게 됐다.

사건과 사적

1947년3월15일 심야, 난강의 인장(鄰長-통반장의 반장 격) 수시준(蘇溪圳)은 총소리를 듣었다며 아침에 난강교 다리 밑 농지에서 8구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손발은 뒤로 묶여졌고 천으로 입을 막았고 옷은 흐트러진 모양인데, 길옆에서 총살된 후 다컹계에 유기한 것으로 보이며 시신은 끔찍해 보였다고 한다. 이중에 신분이 확인된 자는 우홍치(吳鴻麒), 린쉬핑(林旭屏), 정충(鄭聰), 저우위안궈(周淵過), 린딩즈(林定枝)이며, 기타 3구의 시신은 찾는 사람이 없는데 스지앙난(施江南)과 천우(陳屋) 등일 것이란 얘기가 있다. 우홍치는 타이완고등법원의 판사로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외투와 회중시계, 신발 모두 없어졌고 시신은 상처투성이었는데 그의 오른 쪽 뒤통수에 총을 대놓고 쏘아 사살된 것이었다. 린쉬핑은 도쿄제국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해 행정과 고등문관 고시를 통과한 후 타이완으로 돌아와 일하다가 사건에 연루돼 주검이 되었다. 그는 죽기 전에 손발이 뒤로 묶였고, 머리와 신체 여러 곳에 상처가 있었다.

1947년4월 행정장관공서는 ‘기한 내에 난강 피살 사체 8구를 밝혀내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타이베이시 경찰국은 곧바로 사람을 난강으로 파견해 조사하도록 했고, 유가족들이 시신을 발견한 경과도 상급에 보고했다. 경비총부는 5월30일에 장제스에게 상정한 보고에서 이 사건은 타이베이 시내 불량배 비밀조직의 소행이었다고 전했다.